인도 역사 속 무굴 제국의
마지막 장이 펼쳐질 시간이야.
그리고 그 마지막 장은,
불붙은 분노, 탄약통에 스민
종교적 모욕, 그리고 제국의 상징이
무너지는 날로 이어졌지.
1857년 세포이 항쟁(Sepoy Mutiny)과
무굴 제국의 공식적인 종말,
그리고 영국 식민지 통치의 시작점을
이야기해볼게.
총성과 함께 무너진 왕좌
무굴 제국은 이름만 남고
진짜 권력은 이미 떠나 있었어.
18세기 중반 이후,
무굴 황제는 델리의 성 안에 갇혀 살면서도
황제 행세만 할 뿐
정치·군사적 실권은 거의 없었어.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영국 동인도 회사.
이제 그들은 단순한 무역상이 아니라
군대를 거느린 사실상 지배자였지.
인도인 병사들, ‘세포이(Sepoy)’는 누구였을까?
‘세포이’는 동인도 회사 군대에 소속된
인도인 병사를 말해.
대부분은 힌두교도나 이슬람교도였고,
자국 영토를 수호하는 게 아니라,
외국인 지배자들을 위해 싸우는 상황이었지.
그리고 1857년,
그들의 인내는 한순간에 무너져.
기름칠된 탄약통 – 폭발의 도화선
동인도 회사가 새로운 소총을 지급하면서,
탄약통을 입으로 뜯어야 하는
설계가 문제가 됐어.
그런데 소문이 돌았지.
“이 탄약통에 소고기 기름과
돼지고기 기름이 발라져 있대.”
힌두교도에게 소는 신성한 존재,
이슬람교도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
즉 모두에게 금기였던 거야.
이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종교적 모욕이자 지배자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불러일으켰어.
1857년 5월 – 메러트에서 시작된 반란
델리 근교의 소도시
'메러트(Meerut)'의 주둔군에서
탄약통 지급을 거부한 세포이들이
체포되고, 공개 처벌을 받아.
분노한 병사들은
무기를 들고 폭동을 일으켰고,
곧바로 델리를 향해 행진했지.
델리, ‘명목상의 황제’를 다시 왕좌에 앉히다
세포이들은 델리에 도착해서
그동안 잊혀져 있던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II)'를
강제로 끌어내어 반란의 상징이자
'국왕'으로 옹립해.
“황제가 진짜 힘이 있든 없든,
우리에겐 깃발이 필요하다.”
하지만 황제는 82세 노인,
힘도, 군대도, 전략도 없었지.
반란은 델리를 시작으로
북부·중부 인도의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갔어.
하지만 결국, 영국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영국은 전쟁 경험이 풍부한
용병과 군함을 동원해
반란 지역을 하나씩 진압했어.
반란이 격렬했던 델리, 카눈푸르,
럭나우 등에서는 보복 학살과
도시 파괴가 자행됐지.
1858년, 반란은 완전히 진압됐고
세포이 항쟁은 실패로 끝났어.
황제는 유배되고, 제국은 막을 내리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체포되어
미얀마(당시 버마)의 랑군으로 유배됐고,
그곳에서 무력하게 생을 마감했어.
무굴 제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됐고,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해산시키고
인도를 직접 영국 왕실의 식민지로 삼았지.
인도는 이제 '황제 없는 나라'가 되었다
1858년부터 인도는 ‘빅토리아 여왕의
직할령’이 되었고,
무굴의 궁전은 박물관과 병영,
왕궁은 기념비적인 유물이 되었지.
제국의 무덤 위에 세워진 식민지
세포이 항쟁은 반란이었지만,
인도인들의 첫 전국적인
저항운동이기도 했어.
그것은 무굴의 몰락을 상징했고,
동시에 인도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