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태종 이세민이 남긴 기반은 정말 튼튼했어.
그 뒤를 이은 황제들 중 '당 현종(唐玄宗)'은
이 기반을 바탕으로 문화와 경제,
예술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되지.
특히 이 시기의 융성함을
중국 사람들은 '개원의 치(開元之治)'라고 부르면서
정관의 치와 더불어 당나라의 '황금기'로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모든 황금기엔 그림자가 있잖아?
당 현종의 말년엔 이 그림자가 점점 커졌어.
그 중심엔 바로, 양귀비와 안녹산이라는 인물이 있었지.
당 현종과 양귀비 – 사랑과 정치의 경계
당 현종은 말년에 접어들면서
국정보다 양귀비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돼.
양귀비는 원래 황태자의 부인이었지만
현종이 그녀를 황후처럼 대하며
궁 안의 권력이 바뀌어갔지.
양귀비는 자신의 친척들을 요직에 앉히면서
궁중 안팎에서 불만이 점점 쌓여갔고,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안녹산(安祿山)이었어.
안녹산은 변방의 유목계 장수 출신으로
이민족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뛰어난 무력과 아첨으로 당 현종의 총애를 받았어.
결국 그는 거대한 군권을 손에 쥐게 돼.
안사의 난 – 황제의 사랑이 부른 대재앙
755년, 안녹산은 드디어 반기를 들었어.
“내가 장안을 접수하겠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격했지.
처음엔 당나라 조정이 너무 방심한 탓에
순식간에 장안이 함락되고
당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도망쳐야 했어.
도망치던 도중, 군사들은 분노했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양귀비 때문이라고 했고,
결국 현종은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해.
이 장면은 후대 문학에서
‘비운의 사랑’으로 많이 회자되었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국가적 재앙이었지.
당나라의 회복… 그러나 이미 균열은 시작됐다
안녹산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한때 당나라의 절반을 차지했어.
하지만 내부 분열과 토벌군의 반격으로
결국 안사의 난은 763년에 진압되긴 해.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였어.
당나라 조정은 난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의 절도사(장군)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넘겨줬어.
이 말은 곧 지방이 중앙보다
더 강해졌다는 뜻이었지.
즉, 중앙 집권이 무너지기 시작한 거야.
문화는 피어났지만, 힘은 빠져갔다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이전 같은
강력한 통일국가가 아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같은
걸출한 시인들이 등장하면서 문화적으로는
엄청난 유산을 남기게 돼.
그러니까 몸은 병들었지만
정신은 찬란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지.
몰락을 향한 길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회복되지 못하고
지방 절도사들의 분열과 반란이 이어졌고,
황실은 점점 무기력해졌어.
거기에 황실 내 쿠데타, 이민족의 침입,
내부 반란까지 이어지면서
907년, 당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