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말레이시아 이야기] 1969년 인종 폭동 – 다민족 국가의 그림자가 드리우다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5. 27.
728x90
반응형

 

이제 우리는 말레이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


바로 1969년의 인종 폭동(5·13 사건)과 그 여파로

시작된 ‘신경제정책(NEP, New Economic Policy)’의

시대로 들어가게 돼.

이 사건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다민족 사회’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그리고 그 안에서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균형을 시도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분기점이야.

 

선거가 불러온 긴장

1969년, 말레이시아에서는 총선이 열렸어.
당시 여당은 UMNO를 중심으로 한 연합

(Alliance Party)이었고,
그동안 안정적인 지배를 해오고 있었지.

 

하지만 이번엔 야당들이 중국계 중심의 DAP,

다민족 개혁을 주장한 Gerakan(게라칸)
같은 정당들이 큰 지지를 얻었어.

 

특히 도시 지역에서는 여당이 밀리고,
야당이 주정부를 차지할 만큼 약진하게 되지.

폭동의 발발 – 5월 13일

선거 결과 발표 직후, 쿠알라룸푸르에서 중국계

야당 지지자들의 축하 행진이 있었어.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말레이계 주민들과

충돌이 생기고, 곧 폭력 사태로 번지게 돼.

정부는 이 사태를 ‘5·13 사건’이라 명명했고,
정확한 사망자 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수백 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알려져 있어.

 

거리에서는 집에 불이 나고, 사람들은 도망치고,

군대가 투입되고,
말레이시아 수도가 마비된 비상사태 상태가 되었지.

국가의 대응 – 민주주의 잠시 멈춤

이 사태로 인해 정부는 곧바로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의회를 정지시키고, 국가운영위원회(NOC,

National Operations Council)라는 비상 행정기구를

출범시켰어.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툰 압둘 라작

(Tun Abdul Razak)'. 그는 이후 총리가 되어

말레이시아의 방향을 다시 설계하게 돼.

신경제정책(NEP, New Economic Policy )의 등장 – 말레이인의 경제력 회복

정부는 폭동의 원인을
'말레이계와 중국계 사이의 경제 불균형'으로 진단했어.

 

실제로 당시 말레이계는 주로 농촌에 살며 빈곤율이

높았고, 중국계는 도시 상업과 경제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지.

 

그래서 1971년, 신경제정책

(NEP: New Economic Policy)이 시작돼.

NEP의 목표는 두 가지였어

  1. 빈곤 감소 – 모든 민족의 절대 빈곤을 줄이자.
  2. 경제 구조 개편 – 말레이인을 경제 중심으로 끌어올리자.

특히 두 번째 목표는 대학 진학 우선권, 

공무원 채용 비율, 기업 지분 배정

(30% 말레이계 소유 보장), 주택, 대출, 토지 혜택 등
말레이계에게 구조적인 특혜를 주는 정책이었지.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정책

NEP는 분명히 말레이계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고,

중산층도 형성됐지만, 그 반면에 중국계, 인도계 등

비말레이계는 차별을 체감했고,

‘이게 평등한 나라 맞아?’라는 질문도 생겨났지.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 정책이 없었다면

나라가 더 갈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했어.

 

정리하자면, 1969년 인종 폭동은 말레이시아

다민족 국가 모델의 뼈아픈 현실이었고,
그 뒤에 나온 NEP는 상처를 덮고 균형을 잡기 위한

국가 차원의 응급조치였어.

 

다만, 그 조치는 갈등을 잠재웠지만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고, 말레이시아 사회의 깊은 구조를

지금까지도 형성하고 있어.

반응형